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프 매카시 (문단 편집) === 최후 === ||[[파일:mccarthy-newspaper-1024x810.jpg|width=100%]]|| || '''McCARTHYISM IS TREASON TO AMERICA''' '''매카시즘은 미국에 대한 반역이다''' || 그렇게 미 전국이 매카시를 지지하며 지지 기반이 확고해지는 듯 했지만 그의 아무 근거도 없는 소련 스파이(혹은 빨갱이) 사냥은 곧 밑천을 드러냈고 사람들도 점차 반공에 지쳐가 거품이 꺼지고 있었다. 결정타로 미국 저널리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CBS(미국 방송)|CBS]]의 앵커 [[에드워드 머로]]가 자신이 진행한 시사 프로그램인 '씨잇 나우(See it now)'에서 그를 매우 논리적으로 비판한 반면 매카시는 그저 인신공격과 어거지 논리만 주장하자 그 영향력을 잃었다.[* 단 어느 나라에나 [[광신도]]가 있기 마련이라 여론조사 33%가 머로는 공산주의자라고 답하기도 했다.] 이 과정은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굿나잇 앤 굿럭]]이라는 영화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 영화에는 공산주의자들을 고발하는 매카시의 연설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연기가 너무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시사회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면은 배우가 연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 매카시의 연설을 찍은 필름을 삽입한 것이었다고...] 또 유명한 첩보 스릴러 영화인 [[1962년]]작 [[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서도 매카시를 모델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 이렇게 반공 선동의 부작용으로 매카시는 궁지에 몰렸는데 이때 초조하여 머리가 안 돌아갔는지 멍청하게도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는데 바로 '''군부를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문민통제가 잘 되는 국가이기도 하나 당시에는 2차 대전-냉전으로 군부의 힘이 강했다. 군 장성 출신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었을 정도. 다만 아이젠하워가 군복을 벗고서 권력을 탐하지 않았기에 이후 장성 출신 대통령은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젠하워는 군에 잔뼈가 굵어 군부의 잔머리 예산을 칼같이 잡아 거부해도 군부는 아이젠하워에게 별다른 소리를 안 할 정도의 영향력도 있었다.] 매카시는 군부 내의 고위 장교 및 장성들 사이에도 소련 간첩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결정적으로 현대적인 미군의 설계자이자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조지 C. 마셜]]을 [[https://alphahistory.com/coldwar/joseph-mccarthy-condemns-george-marshall-1951/|비난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 유명한 [[마셜 플랜]]을 제창한 군인으로, 2차 대전 초기에 미 육군을 바닥부터 다시 쌓아올리고 병사들 훈련 및 교육, 보급을 비롯한 온갖 부분에서 활약하여 '승리의 설계자'라는 별칭을 얻고 아이젠하워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군부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군 내부의 분노를 불러왔을 뿐 아니라, 원수 출신이자 조지 마셜의 부하였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군부 고위급에 스파이가 있다는 주장은 몇 년 전까지 군의 최고위층이었던 아이젠하워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문제였고 더군다나 아이젠하워는 공화당이 [[민주당(미국)|민주당]] 20년 정권 끝내 보자고 원래 민주당 성향이었던 인물을 정말 온갖 노력과 설득으로 영입해서 대통령까지 만든 인물이었다. 공화당으로선 자당 소속 대통령은 물론 공화당까지 팀킬[* 당연한 게 아이젠하워를 영입할 때 검증을 제대로 못 했다는 비판을 공화당도 받게 되고 민주당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면 또 정권을 빼앗겼다.]할 수 있는 매카시의 최후의 발악에 가까운 돌출행동을 용납할 수 없기에 매카시가 속했던 공화당조차 그에게 의구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954년 4월 21일 육군-매카시 상원 청문회가 열렸고 청문회가 한창이던 6월 9일, 보스턴에서 변호사 업무를 맡다가 육군측 변호인으로 나선 조지프 나이 웰치와 설전을 벌였는데, 여기에서 논리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완패했다. >Let us not assassinate this lad further, Senator. You've done enough. '''Have you no sense of decency, sir?''' At long last, have you left no sense of decency? >이 젊은이를 더 이상 죽이지 마시지요, 상원의원. 당신은 할 만큼 했습니다. '''당신께서는 품위가 없으십니까?''' 마침내, 당신께서는 품위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이 때 나온 위의 웰치의 한마디는 매카시에게 결정타를 날려주었고, 청문회 종료 후 [[1954년]] 12월에는 자기가 속한 상원에서까지 비난결의가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민주당(미국)|민주당]]에선 유일하게 [[존 F. 케네디]]가 기권했다.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이유였지만 아일랜드계에 대한 후원 때문에 일부러 기권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비록 상원의원으로서의 신분은 유지했으나 사실상 민주당과 소속당 공화당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의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의에 빠진 매카시는 지병인 [[편두통]]이 더욱 심해졌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더욱 술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실의에 빠진 채 [[1957년]] 만 4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과음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급성 [[간염]]. 반공주의 열풍을 이용해 권력을 쥐기 위해 무지성 반공운동에 앞장서 칼자루를 휘둘렀으나 결국 자신이 해 온 모든 악행을 돌려받은 채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야말로 [[인과응보]]인 셈. 용케도 죽을 때까지 상원의원의 신분은 유지해서[* 미국 상원의원의 임기는 6년이라서 매카시의 임기는 1958년까지였다.] 장례식에 당시 [[미국 부통령|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과 양 당의 주요 인사들이 의례적으로 참석해 주긴 했다. 매카시 사후 그의 선동에 의해 사회적 매장을 당한 인물들 중 죽은 자들은 사회적 지위와 공적이 복원되었고 살아남은 자와 친인척들도 사회에 돌아와 일상 생활에 복귀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